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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2022. 7. 7. (수) 흘러가기

by 오하시스 2022. 7. 7.

요새 일기에 소홀했다.

차분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찾기가 어려웠던 건지, 사실 그럴 수 있는 시간은 많았는데 단지 차분히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 아리까리하다.

바쁘다 바쁘다 생각했지만 또 바쁘지도 않은 것이 밀려오는 생각이 귀찮아서 차분히 생각하는 걸 회피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회피라는 행위는 나에게는 보통 귀찮음이라는 감정에 의해 발현되는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의해 발현될 것도 같다.

근데 나는 두려우면 오히려 보통 직면하는 것 같다. 롤러코스터나 바이킹 같은 놀이기구를 좋아하는 거랑 비슷한 맥락이려나? 스릴 넘치는 기분, 두려움이란 감정은 내게 대개 긍정적이다. 두려움을 극한까지 느끼고 싶어서 그 감정을 유발하는 대상을 만나면 곧바로 들이 받아 버린다. 근데 여기서 두려움이란 공포보다는 당황에 가까운 두려움을 말한다. 예기치 못한 상황 같은거! 완전히 Y자의 yes or no 선택의 기로까지는 아니더라도 모호한 상황에서 분별을 해야 할 때? 어느 쪽을 선택하거나 적어도 어느 쪽을 향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잘 모르는 상황에서 일단 향해보고 나면 재미가 있다. 이건 내가 MBTI S/J 조합이 아니라 N/P 조합이라서 그런 것 같다. 이건 경험과 계획이 아닌 직관과 충동을 선호하는 조합이다. 그런 안개 속 같은 모호함 속에서 방향을 정해야 하는 일이 재밌다. 또 방향을 정'해야'한다고 느낄 새 없이 정해버리는 게 더 재밌다. 계속 그렇게 방향을 정해서 가다보면 어느 순간 뒤돌았을 때 혹은 위에서 독수리처럼 내려다 보았을 때 어라 이 경로가 알고보니 이런거였구나 하는 거가 좋다. (차로 마구 달리던 길이 하늘위에서 내려다보니까 꽃 모양이었구나 하는) 방향을 정하는 순간이 크게 한 번 있는 것보다 자잘자잘하게 많은 게 부담 없어 더 좋다. 단 아무래도 실수는 조금 줄일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귀찮은 건 너무 귀찮고 또 귀찮고 또 싫다. 싫은 감정이 마구마구 밀려든다. 귀찮다는 감정은 귀찮은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대상이 차곡차곡 쌓임에 따라 비례적인게 아니라 누진적으로 커져간다. 그래서 귀찮은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나에게는 회피라는 행위를 유발하곤 했는데, 요새는 귀찮은 일을 더 빨리 해치우려고 하고 있다. 경험상 이걸 회피해서 귀찮은 게 쌓이면 더 귀찮아지고 그러면 귀찮은 게 더 쌓여서 싫음이 폭발해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요새는 뭐랄까 쌓이는 게 없다. 두려운 건 즐거워서 빨리 해버리고, 귀찮은 건 더 귀찮기 싫어서 심지어 더 빨리 해버리고. 그래서 뭐랄까 잔고가 없는 느낌이다. 재무제표로 치면 수익에서 비용을 빼서 플러스나 마이너스의 손익이 생기는게 보통이고 손익이 영이 되는 경우는 잘 없는 손익계산서이기보다는 항상 차변과 대변을 일치시켜야 하는 재무상태표랑 비슷한 거다. 그렇다고 부채나 자본의 개념에 대입해서 비유하긴 어려운 느낌이다. 주식은 발행하지 않고 사채만 발행하는 기업이 채무를 계속해서 잘 상환해나가는 거랑 비슷하긴 하겠다.

회사에서 독서 멘토링을 할 때 시간이 조금 남아서 한 10분 정도 꼭 책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궁금한 거나 상의하고 싶은 게 있으면 편히 말해달라고 멘티들에게 얘기를 꺼냈었다. 한 중학생 친구가 어떻게 사려고 하냐고 물었다. 삶의 지향점같은거? 네. 인생의 모토말하는 거다. 아무래도 자기계발서는 요새 사람들은 다 싫어하는 거 같다. 그치만 굳이 따지자면 내 삶의 지향점은 '균형'이다.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잡힌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렇게 치면 매일 매일 매순간 매순간 채무를 잘 상환해 나가 잔고를 0으로 만들고야 마는 지금의 나는 지향하는 대로 살고 있는 것도 같다.

지금이 좋은 거는 비로소 내가 누군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는 데 있는 거 같다. 사람은 계속 바뀌기도 하고 안 바뀌기도 하고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래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기 자신에 관심이 아예 없는 사람이 아닌 이상 (그런 사람은 이론적으로도 상정하기 어려울 거다) 자기 자신을 붙들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큼은 점점 더 잘 알'게 되어 간다'. 그래서 성인이 되고 난 후 10년 정도 지난 시점에 사람은 저마다 자기 자신은 그래도 이전까지의 자신보다는 현재 시점에 젤 잘 아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어떤 게 좋다. 어떤 게 싫다. 이런 게 사람마다 있을텐데, 다른 사람이나 상황 등 외부적인 요소는 어떻게 컨트롤이 안 되지만 적어도 자신의 감정과 행위만은 본인이 지향하는 대로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이다.

채무 정산의 삶은 원하던 바다. 저량(Stock)이 쌓이는게 싫고 대신 유량(Flow)이 활발한 게 좋다. 흘러가는 거. 누군가는 저량(Stock)을 차곡 차곡 쌓아올리는 거에 뿌듯함과 흡족함을 느끼고 마치 인생의 성을 쌓듯이 유량(Flow)은 자신이 지은 성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위험이 되기 전까지, 최대한 조금씩 조금씩 자기가 통제할 수 있고 또 쌓아올리는 행위에 도움이 되는 수준에서만 받아들일 거다. 그런데 내게 저량(Stock)은 차라리 없는 게 좋다. 모래성은 그냥 썰물이 있은 후 밀물이 오기 전까지 심심해서 짓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쌓이는 게 있다면 그건 밀물과 썰물이 왔던 순간들의 총체겠다. 이건 추억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한편 만약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추억이라 말할 수 있는 순간들의 기억을 모두 잊어버린다면 그건 지금 기준으로 생각하면 너무 슬프지만 이미 잊어버린 미래 기준으로는 또 그 순간들의 밀물과 썰물이 존재할 테니까 잘 살 거 같다. 그런데 아무래도 지금 기준으로 생각하면 너무 슬프니까 이 부분은 자신이 없어서 색깔을 바꿔야겠다)

내게 소중한 건 끊임없는 밀물과 썰물이고, 또 그런 순간들이 쌓여서 인생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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