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12.
세상 일이라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하면 모든 게 의미가 있고,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면 모든 게 의미 없어지는 것 같다.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해골바가지 고전스토리처럼...)
최근 몇 주간 거의 유사한 쟁점의 두 개 회사의 세무조사 대응에 관여하게 되었다.
머리가 아프지만 간략한 쟁점은 다음과 같다 :
외국 모회사(A)가 국내 고객사(B)에 장비(완제품)를 판매하였는데, 이때 A가 한국 자회사(C)와 위탁서비스계약을 체결하여 한국 자회사(C)가 국내 고객사에 장 비의 설치 및 보증서비스를 제공하였고, 그 과정에서 C가 필요한 부품은 A로부터 무상으로 수입하였다. 그렇게 무상으로 수입하는 과정에서 C는 관세와 부가가치세를 납부하였는데, (...)
그만해야겠다. 사실 쟁점은 오늘 일기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무튼 두 개 회사의 세무조사 대응은 원래 S회계법인이라는 데에서 주도하고 있고, 우리 회사는 보조적인 역할만 수행하고 있었다. 나중에 세무조사 후 과세가 되면 불복 단계에서 우리 회사가 수임을 하려고 그 전부터 약간의 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조사반이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한 것에 대해 S회계법인이 이미 의견서를 제출하였음에도 우리 회사에서도 보충의견서라는 것을 제출하게 되었고, 나는 위 두 개 회사 중 하나(1)의 보충의견서 초안을 쓰면서 나머지 하나(2)의 보충의견서까지 쓰는 바람에, 어쩌다 두 건에 모두 관여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갑자기 아웃룩에 중부지방국세청(수원에 있다) 방문 일정이 뜨면서, 나는 지난 주 월요일 오후와 이번 주 금요일 오후에 모두 수원으로 첫 출장을 가게 되었다(참고로 저녁에는 수원에서 서울로 오는 차가 매우 막혀서 택시를 미리 잡아두는 편이 좋다)
중부지방국세청도 첫 방문이었는데, 매점도 깔끔하고 주변에 나무도 많고 시설도 되게 세련되고 좋았다. 첫 번째 방문 때는 매점에서 미에로화이바를, 두 번째 방문 때는 박카스를 사 마셨다. 메뉴가 많지는 않았지만 매점에서는 자체적으로 제조하는 커피도 이것저것 팔고 있었다.
이렇게 세무조사 대응을 하면서 국세청을 방문하는 것은 과세를 하기 전에 국세공무원이 신청을 하여 과세사실판단자문위원회라는 것이 열리기도 하고, 거기에서 납세자와 과세관청 모두 각자 의견을 개진하기에 앞서 납세자가 이런저런 설명을 미리 하여 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1)회사 건 관련 첫 번째 방문 때는 나를 포함하여 우리 회사 시니어 회계사님 한 분, 주니어 변호사님 한 분, S회계법인에서도 한 분, 회사에서도 2분이나 참석을 하셨다. 다들 엄청나게 경직되어 있었고 준비도 무려 1시간이나 하였으며, 회의도 1시간 30분정도를 하였다. 쟁점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을 하였고, 회사 분들도 많은 어려운 사정들을 토로하시며 선처를 요청하셨다.
결과는 요지부동! 사실 결과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본인들은 과세사실판단자문위원회에 신청도 안 할 것이며, 그대로 과세 의견이라는 것이다. 택시가 막혀 사무실에 도착하니 7시가 되어 있었다. 구내식당 메뉴가 맛있었기에 망정이지 (버섯탕수육) 야근이고 모고 요가하고 칼퇴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일주일 뒤, (2)회사 건 관련 두 번째 방문 때는 훨씬 조촐했다. 첫 번째 방문 때는 1주일 전부터 방문 일정이 예약되어 있었던 반면, 두 번째 방문 때는 (2)회사의 다른 이슈들도 함께 문제되던 차라 정신이 하나도 없을 만큼 눈코 뜰새 없이 바빠 방문 일정도 이틀 전 급하게 잡혔다. 나는 의견서 쓴지도 오래되어 기억도 가물가물... 같이 간 분은 시니어 회계사님 한 분, 작년에 경력직으로 입사하신 시니어 세무사님 한 분이었는데 (회사에서는 아무도 오시지 않았다) 면담 10분전까지 두 분 모두 내게 사실관계를 잘 아시니 나만 믿겠다고 말씀하셨다. 무언가 망할 것 같은 느낌! 그치만 분위기는 훨씬 발랄하고 유쾌해서 기분은 왠지 좋았다.
회의는 30분만에 끝났다. 청에서는 이렇게 얘기하셨다. ‘사실 사건조사서 이미 다 썼어요’. 그런데 (1)회사랑은 쟁점이 다른 것 같다고 하시면서,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는 과세 안 하는 것도 충분히 일리가 있는 것 같단다. 우리는 조금은 애교를 부렸고, 그러자 사건조사서는 중립적으로 작성하였으니 과세사실판단자문위원회에서 잘 말해보라고 말씀 주셨다.
금요일 저녁인데도 돌아오는 길은 저번보다 막히지 않았다. 일이 밀려 금요일 저녁임에도 구내식당에 갔는데 (메뉴는 회덮밥으로 지난번보다 허접했다. 통상 금요일 저녁마다 구내식당 메뉴는 수요가 적어서인지 심지어 더 허접하기 때문이다) 왠지 일하는 게 재미있어서 월요일까지 하면 되는 일까지 우다다다 하고 밤 늦게 퇴근해 버렸다.
고작 두 번의 방문 경험이지만 결과나 분위기나 매우 달랐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그렇다. 우리가 얼마나 준비하였는지 여부가 결과를 얼마나 뒤흔들까? 마치 청에서는 이미 자신들이 자체적으로 판단하여 결정을 내리는 것이지, 의견서를 얼마나 유려하게 쓰는지, 얼마나 공들여 의견을 개진하는지 여부가 결과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ㅠㅠ).
그렇지만 나는 그 순간들이 돌이켜 보면 재미있었다. 어떻게 될 지 모르니까 더 재미있는 것 같다. 완벽해야만 한다는 압박과 부담에서 한층 벗어난 기분이랄까..! 만약 50만큼의 노력을 하면 50만큼의 결과, 100만큼의 노력을 하면 100만큼의 결과가 나온다면 그건 예측 가능한 의미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실 여기서 전제부터 잘못된 게(잘못이라고 칭하는 게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의미란 수치화할 수 없는 개념이기도 하다. 5점짜리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방문하는 것만이 5점짜리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닌 이유는, 결과적으로 1점짜리로 평한 영화라도 그것을 보기 위해 영화관을 방문하면서 1점짜리 영화로 평할 수 있는 경험을 하였고, 더불어 영화를 제작한 자에게 수익을 올려주는 좋은 소비자의 역할을 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 영화가 1점이라는 평을 전달하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의 가치는 절대 1점짜리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변호사 일도 뭐든 열심히 하는 것이 본인에게 경험이 될 뿐만 아니라, 고객에게는 어찌되었든 대리인으로서 맡은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경험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 같다(내가 이런 건설적인 이야기를 하다니 큼큼).
아차 까먹은 것이 있는데 이게 오늘의 핵심이다. 영화관을 혼자 방문하는 것도 좋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방문하는 경우, 둘 간에 1점짜리 영화를 본 기억도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는다. 이때 중요한 것은, 화내거나 싸워서는 안 된다. 1점짜리 영화를 봤다고 왜 이런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나를 데려왔냐고 투덜거려서는 안 된다. 재미없는 영화도 간만에(또는 나와 다른 혹평러라면 여느 때처럼) 혹평을 남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두 번의 국세청 방문 역시 결과 여부를 떠나 메일로만 보던 분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뜻 깊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그게 무엇이든 뜻 깊을 수밖에 없는데, 이때 투덜거리거나 싸우거나 토라지면 그 기억은 조금은 부정적인 것으로 퇴색될 수밖에 없다.
내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면 진짜 의미가 없는 게 되어 버리고, (이런 영화 따위 보느라 오늘 하루 다 날렸네! 어차피 과세될 거 수원까지 왜 갔담? 심지어 잘 되어도 어차피 안 가도 잘 풀렸을 거 수원까지 갈 필요 없었네? 등등)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면 모든 게 의미가 있는 순간들이다. 스스로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들은 그것을 함께 하는 사람에게도 좋은 에너지를 불러일으킨다. 에너지를 잃지 않기 위해서 몸과 마음 건강이 제일 중요하니까 토요일 토요일 낮에는 언제나처럼게으름을 피운다. 저녁에는 맛있는 화덕피자를 먹으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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