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19.
그저께 수원지방법원을 다녀왔다. 부장님 1분, 나보다 2년차 높은 주니어 변호사 1분, 나, 이렇게 셋이서 기일 출석 후 오후 늦은 시각 사무실로 복귀하는 길이었다. 주니어 변호사님과 부장님은 뒷자리에 앉으셨고 나는 기사 아저씨 옆자리에 앉았다. 카카오 벤티를 부르면 앞 좌석과 뒷 좌석은 묘하게 단절된다. 마치 커피숍에서 시험공부를 할 때 옆 테이블에 앉은 아주머니들께서 떠드시는 수다를 몰래 엿듣는 것 같은 재미가 있다. 나는 재미만 느끼고 부장님의 수다에 맞장구를 치지 않아도 되어서 내심 좋았다.
거의 도착할 무렵이었나? 택시 아저씨가 나와 같이 부장님의 수다를 엿들으시다가 우리가 변호사라는 사실을 알고 법 질문을 하나 하셨다. 사안은 이렇다. 본인은 ‘SKY 택시’라는 상호를 사용해온 개인 택시운전사인데, 얼마 전 다른 택시운전사 한 분이 자신도 ‘SKY 택시’라는 상호를 사용하고 있고, 자신이 상호를 먼저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호도용에 기한 손해배상청구를 하겠다고 협박하셨다며,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물어보신 것이었다.
함께 있었던 주니어 변호사님은 달변가이시다. 세상에 ‘SKY 택시’가 얼마나 많을 텐데 그런 협박에 당황하시지 말고 우선 다른 ‘SKY 택시’라는 상호를 사용하는 택시운전사분들이 있는지, 그 분들도 협박을 당하셨는지 알아보고 만약 똑같이 협박 피해를 당하셨다면 힘을 모아 대처하는 방안을 생각해보라고 하셨다. 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상대로 괜히 소송 얘기부터 꺼내면서 합의금 명목으로 돈을 뜯어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도 덧붙이셨다. 묘하게 단절되었던 앞 좌석과 뒷 좌석의 장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뒷 좌석에 앉으면 사람은 얼굴(입 포함)이 앞에 달려 있기 때문에 앞 좌석에 앉은 사람의 귀에 말소리가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반면 앞 좌석에 앉아도 얼굴이 앞에 달려 있기 때문에 뒷 좌석에 앉은 사람의 귀에 소리가 다가가기 어렵다. 얼마나 다행인지! 나는 또 한번 재미만 느끼고 택시운전사분들의 고충해결에 앞장서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저녁에는 구내식당에서 우연히 마주친 동기가 깜짝 퇴사 소식을 알렸다. 동기는 다음주 퇴사할 예정이었다. 우리는 밥을 먹고 회사 옆 건물 5개 정도의 짧은 산책 코스를 돌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법이랑은 완전히 다른 분야로, 스타트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단다. 연봉도 낮아지고 직위도 낮아지지만 무언가 결심했다는 게 멋있어 보였다. 내가 퇴사를 고민할 때도 사람들과 나눈 얘기이지만, 후회하지 않을 일이란 사전적인 개념(=절대적 개념)은 절대 아니고, 후회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사후적으로 만들어가는 개념(=상대적 개념)인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주위에 떠밀려 결정한 것은 시작부터 갈대같이 시작한 거니까 후회하기 쉽고 자신이 직접 결정한 것은 마음먹고 잘 지내보려고 할 것이니 후회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나도 그렇지만 동기오빠도 지금까지는 자신이 직접 중대한 결정을 내려본 적이 거의 없단다. 그래서 이렇게 중대한 결정을 내려본 것부터가 앞으로 스타트업에 종사하면서 내릴 무수히 많은 의사결정을 향한 첫 연습인 것 같단다. 그 말을 들으니 더욱 큰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름’이 문제였다. 동기오빠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대기업 부회장과 이름이 같다. 아무래도 큰 사람이 되려면 이름이 널리 알려질 것을 생각해야 하는데, 이미 너무 큰 사람과 이름이 같으면 경쟁력을 가지기 어려울 것이다. 예컨대 변호사는 개업을 하면 OOO법률사무소, O&O 법률사무소라는 식으로, 자신의 이름 석자나 동업자와의 성을 조합하여 명칭을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름을 너무 대충 짓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보수적인 동네에서 너무 특이한 이름을 지었다가 망할 위험도 있고, 무엇보다 본인의 ‘이름’이 알려지면 고객이 그 변호사를 더 잘 기억하고 찾을 수 있다는 점이 그 이유가 아닐까 싶다. 스타트업은 무언가 다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동기오빠가 성공하려면 구글에 이름을 쳤을 때 기사 한 줄이라도 나왔으면 좋겠는데, ‘최신순’으로 하면 나올 수도 있지만 ‘정확도순’으로 하면 대기업 부회장님을 앞지르기 위해서는 범죄나 그에 준하는 큰 만행을 저지르는 방법밖에는 없는 게 흠이었다.
어제 밤에 퇴사하기 직전인 동기오빠랑 또 다른 동기언니랑 개명 방안에 대하여 논의를 하였다. 일단 동기오빠는 ‘돌림자’로 하면 원래 이름이 현재 이름에서 마지막 글자가 ‘복’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하나는 내 이름이랑 동기오빠의 이름을 서로 바꾸는 것이었는데, 동기오빠는 마음에 들어 했지만 그러면 내 이름이 너무 이상해져서 나에게는 피해가 가는 안이었다. 세 번째는 외자를 쓰는 것이었는데, 현재 이름에서 중간글자를 삭제하고 나머지 두 글자만 남기는 안이었다. 마지막은 동기오빠의 MBTI 를 그대로 이름으로 반영하는 안이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현재 이름: ㅇ ㅇ 용
- 1안: ㅇ ㅇ 복
- 2안: ㅇ 현 지
- 3안: ㅇ 용
- 4안: ㅇ 엔 피 티 제 이
결론적으로 동기언니랑 나는 1안에 대해 매우 찬성이었는데 (1) 패션이 돌고 도는 것처럼 ~‘복’이라는 이름이 지금은 다소 촌스러워 보일지라도 향후 몇 년 후만 예상해 보아도 멋진 이름으로 인식될 것이라는 점(영어 발음도 편하다는 장점이 있다) (2) 무언가 궁핍해 보이지 않고 복스러워 보이기 때문에 회사 대표로서도 적합해 보인다는 점, (3) 구글링도 해보았는데 변호사를 포함하여 동명이인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 (4) 원래 돌림자에도 부합하여 가족들 또한 크게 이의 없이 찬성할 것이라는 점이 이유였다. 반면, 2안은 나에게 불리하고(나도 나중에 스타트업 대표가 되거나 최소한 개업할 수도 있으니), 3안은 조금 식상하며(나의 로스쿨 지도교수님 성함과도 같다), 4안은 이름이 5글자나 되어 조잡스럽고 행정 절차 관련 불편함이 많이 수반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조금씩 하자가 있었다.
그런데 사실 ‘이름’이란 핸드폰 번호나 자동차 번호와 달리 겹칠 수밖에 없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SKY 택시’까지 나아갈 것도 없이, 동기오빠의 현재 이름은 흔한 편은 절대 아니므로, 그 이름을 지으신 부모님께서는 대기업 부회장이 입사하기 전인 동기오빠의 출생 시점에는 현재와 같은 불상사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결국 이름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를 생각해서 신중하게 이름을 짓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후회할 수밖에 없는 일을 어찌되었든 결정해서 후회하지 않게 만드는 과정이 더욱 중요한 것처럼, 일단 정해진 이름의 이미지를 근사한 이미지로 만들어 (또는 바꾸어) 나가는 사람이 된다면 그건 정말로 멋진 일일 것이다. 가령 ~복이라는 이름이 더 이상 촌스럽게 느껴지지 않도록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동기오빠가 어떤 이름으로 개명하든, 그 이름이 멋진 이름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되는 명사로 거듭 나기를 응원한다!
cf) 오늘은 예술의 전당에 피카소 전을 보러 갔다 왔는데, Pablo Picasso라는 이름 참 예쁘다. 그런데 Pablo Picasso의 본명은 Pablo Diego José Francisco de Paula Juan Nepomuceno María de los Remedios Cipriano de la Santísima Trinidad Ruiz y Picasso(총 103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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